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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해인 수녀 '여름 일기'
 
이해인 수녀 기사입력  2017/08/06 [18: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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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 일기 1
여름엔
햇볕에 춤추는 하얀 빨래처럼
깨끗한 기쁨을 맛보고 싶다
영혼의 속까지 태울 듯한 태양 아래
나를 빨아 널고 싶다

여름엔
햇볕에 잘 익은 포도송이처럼
향기로운 땀을 흘리고 싶다
땀방울마저도 노래가 될 수 있도록
뜨겁게 살고 싶다

여름엔
꼭 한 번 바다에 가고 싶다
바다에 가서 오랜 세월 파도에 시달려 온
섬 이야기를 듣고 싶다
침묵으로 엎디어 기도하는 그에게서
살아가는 법을 배워 오고 싶다

◈여름 일기 2
오늘 아침 내 마음의 밭에는
밤새 봉오리로 맺혀 있던
한마디의 시어詩語가
노란 쑥갓꽃으로 피어 있습니다

비와 햇볕이 동시에 고마워서
자주 하늘을 는 여름
잘 익은 수박을 쪼개어
이웃과 나누어 먹는
초록의 기쁨이여

우리가 사는 지구 위에도
수박처럼 둥글고 시원한
자유와 평화 가득한 여름이면 좋겠습니다
오늘 아침 나는 다림질할 흰옷에
물을 뿌리며 생각합니다

우울과 나태로
풀기 없던 나의 일상日常을
희망으로 풀 먹여 다람질해야겠음을
지금쯤 바삐 일터로 향하는
나의 이웃을 위해
한송이의 기도를 꽃피워야겠음을

◈여름일기 3
아무리 더워도
덥다고
불평하지 않기로 했습니다

차라리
땀을 많이 흘리며
내가 여름이 되기로 했습니다

일하고 사랑하고
인내하고 용서하며
해 아래 피어나는
삶의 기쁨 속에

여름을 더욱 사랑하며
내가 여름이 되기로 했습니다

◈여름일기 4
떠오르는 해를 보고
멀리서도 인사하니
세상과 사람들이
더 가까이
웃으며 걸어옵니다.

이왕이면
붉게 뜨겁게
살아야 한다고
어둡고 차갑고
미지근한 삶은
죄가 된다고
고요히 일러주는 나의 해님

아아,
나의 대답은
말 보다 먼저 또 오르는
감탄사일 뿐
둥근 해를 닮은
사랑일 뿐!

◈여름 일기 5     
사람들은
나이 들면
고운 마음
어진 웃음
잃기 쉬운데

느티나무여
당신은 나이가 들어도
어찌 그리 푸른 기품 잃지 않고
넉넉하게 아름다운지
나는 너무 부러워서
당신 그늘 아래
오래오래 앉아서
당신의 향기를 맡습니다.

조금이라도 당신을 닮고 싶어
시원한 그늘 떠날 줄을 모릅니다.

당신처럼 뿌리가 깊어 더 빛나는
시의 잎사귀를 달 수 있도록
나를 기다려주십시오.

당신처럼 뿌리 깊고 넓은 사랑을
나도 하고 싶습니다.

◈여름일기 6
사계절 중에
여름이 제일 좋다는 젊은 벗이여
나는 오늘
달고 맛있는 초록 수박 한 덩이
그대에게 보내며
시원한 여름을 가져봅니다.

한창 진행 중이라는
그대의 첫사랑도 이 수박처럼
물기 많고 싱싱하고
어떤 시련 중에도
모나지 않은 둥근 힘으로
끝까지 아름다울 수 있기를
해 아래 웃으며 기도합니다.

◈여름일기 7
바다가 그리운 여름날은
오이를 썰고
얼음을 띄워
미역 냉국을 해먹습니다.

입안에 가득 고여오는
비릿한 바다 내음과
하얀 파도소리에
나는 어느새 눈을 감고해녀가 되어
시의 전복을 따러 갑니다.

◈여름 일기 8
엄마의 무릎을 베고
스르르 잠이 드는
여름 한낮

온 세상이
내 것인양
행복합니다.

꿈에서도
엄마와 둘이서
바닷가를 거닐고
조가비를 줍다가

문득 잠이 깨니
엄마의 무릎은 아직도
넓고 푸른 바다입니다.

◈이해인 수녀 걸어온 길
▲본명 이명숙(클라우디아) ▲강원도 양구 1945년 출생 ▲성의여자고등학교 ▲필리핀 성 루이스 대학교 영문학과 종교학 ▲서강대학교 대학원 종교학 석사 ▲1970년 ‘소년’誌에 ‘하늘’ ‘아침’ 등으로 추천 ▲1981년 ‘제9회 새싹 문학상’ ▲1985년 ‘여성동아 대상’ ▲1998년 ‘’제6회 부산 여성 문학상 ▲2004년 ‘제1회 울림예술대상’ ‘한국가곡작시상부문 수상’
▶경력
▲1964년 부산 올리베타노 성 베네딕도 수도회 입회 ▲1992~97년 수녀회 총비서직 수행 ▲1998~2002년 부산 가톨릭대학교 출강
▶시집
▲1976년 ‘민들레의 영토’ ▲1979년 ‘오늘은 내가 반달로 떠도’, ‘내 혼에 불을 놓아’ ▲1989년 ‘시간의 얼굴’ ▲1999년 ‘외딴 마을의 빈집이 되고 싶다’ ▲2004년 ‘꽃은 흩어지고 그리움은 모이고’, ‘꽃을 향한 기도’ ▲2006년 ‘눈꽃아가’ ▲2007년 ‘작은 위로’ ▲2008년 ‘촛불의 노래를 들어라/공저’  ▲2009년  ‘엄마’ ▲2015년 ‘서로 사랑하면 언제나 봄’, ‘내 혼魂에 불을 놓아’, ‘필 때도 질 때도 동백꽃처럼’ ▲2016년 ‘희망은 깨어 있네’, ‘피 묻은 님들이여’, ‘민들레의 영토’,  ‘선물 우체통/공저’

/정리=이민행 대표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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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17/08/06 [18:42]  최종편집: ⓒ rory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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