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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고 싶은 섬 - 신안 장산도
 
이민행 편집인 기사입력  2016/12/16 [13: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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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고 싶은 섬> 3편 - 신안군 장산도(長山島)
3선 국회의원 장재식 전 장관·주영순 국회의원 고향
장산팔경, 생태경관 뛰어나…대성산 ‘대성산성’·‘봉화대’
명산, 오음산·대성산·부학산…부속섬, 마진도·백야도·막금도

 
 옛적 현청이 있던 신안군 장산면은 백제 때는 거지산현, 고려 때는 장산현으로 현청이 있었으며, 산줄기가 오음산에서 아미산, 대성산, 비둘기산, 부학산, 중용마을 뒷산을 거쳐 활목마을 산까지 산줄기가 연결되었다고 하여 장산(長山)이라 불린다. 3선 국회의원을 지낸 장재식 전 산업자원부장관의 고향이기도 하며, 현 주영순 국회의원의 고향이다.

 신안군 장산면은 장산도·마진도·막금도·율도와 마진도(馬津島)·백야도(白也島)·막금도(莫今島) 부속 섬으로 이루어졌으며, 장산도에는 오음산(五音山 208m)·대성산(大成山 180m)·부학산(浮鶴山 115m) 등이 있다. 법정리로 도창·대·오음·공수·팽진·다수·마진도 등 7개리가 있으며, 행정리는 15개리다. 면적은 29.2㎢에 인구 1,809명 984가구(2014년 1월 31일)가 살고 있다.
 장산도에 소재하는 문화재로는 신안 도창리 백제석실분(전라남도기념물 107호), 신안 도창리 노거수림(新安道昌里老巨樹林 전라남도기념물 100호), 장산도 들노래(전라남도무형문화재 21호), 대리 선정비군(大里善政碑群), 대신터 지석묘군(支石墓群), 대성산 대성산성·봉수대가 남아 있다.
 조선시대 국마(國馬)를 기르던 장산 목장터와 백제 때 축성된 것으로 보이는 토성의 흔적이 있다. 오음산 옹달샘 전설과 토미산(兎尾山) 토끼꼬리 전설, 하중밭매기 노래 및 장산도씻김굿·망자혼사굿 등의 제례의식이 전해진다.
◈장산팔경
 장산도는 생태경관이 남달라 아름다운 명승지 8곳을 임영모 씨는 ‘장산팔경’이라 이름 지었다. ▲제1경 오음목적(五音牧笛 오음산 목동의 피리소리) ▲제2경 아미반월(峨媚半月 아미산에 뜨는 반달) ▲제3경 다수수양(多水垂楊 다수리의 우양버드나무) ▲제4경 한운부학(閒雲浮鶴 부학재에 한가로이 흰 구름처럼 높이 뜬 학) ▲제5경 사근백구(沙近白鷗 사근마을 백사장 위로 나는 갈매기) ▲제6경 팽진낙안(彭津落雁 팽진리 모랫벌에 내려앉은 기러기) ▲제7경 용호귀범(龍湖歸帆 용호로 돛단배가 돌아가다) ▲제8경 춘조비소(春鳥飛巢 봄새가 둥지로 날아든다) 등 8곳이다.
◈도창리 ‘백제석실분’
 도창리 백제석실분(전라남도기념물 107호)은 삼국시대 이래 사회적 지위나 신분이 높았던 지배층의 무덤이다. 아미산(=배미산, 해발142.5m) 동남쪽 경사면에 위치하고 있다. 1966년 3월에 마을 청년들이 회관을 세우기 위해 흙을 채취하다 우연히 발견되었다.
◈장산 ‘목장 터’
 조선시대 국가의 우마를 사육하던 장소이다. 왕의 가마와 말 외양간과 목장에 관한 사항을 관장하는 사복시라는 감독관이 배치되어 운영하였다. 장산목장은 망운목장 소속으로 ‘여지도서’나 주읍지에는 목자가 27명이라 기록되어 ‘대전회통’의 정원수(21)보다 많은 것으로 보아 타 목장보다 규모가 방대하였음을 짐작할 수 있고, 비소리 말바위에서 배에 실어 한양으로 진상했다고 한다.
◈대성산 ‘대성산성’·‘봉화대’
 대성산성(大成山城)은 대성산(189m) 정상부에 높이10척, 주위 130칸 되는 성이다. 현존하는 성의 높이는 4m, 폭은 2.5m인데 화강암제를 다듬은 돌로 아주 정교하게 쌓아 올렸으며, 남벽과 동벽은 대체로 원형이 남아 있으나 서벽과 북벽은 허물어지고 숲속에 가리어져 있다.
 축성 시기는 백제시대로 추정되나 정확한 문헌기록은 없으며 또한, 이곳에 ‘봉화대’를 쌓고 왜병선이 인천방면으로 항해하는 것을 감시하여 당시 한성으로 연락하였다고 하며, 진도 완도와 연결하는 봉화의 주봉이었다고 한다.
◈도창리 ‘노거수림’
 도창리 노거수림(老巨樹林)은 전라남도기념물 100호로 지정되었으며, 규모는 352m이며 300년전 방풍림, 위장림, 풍수지리학 등으로 인하여 조성되었다. 마을을 중심으로 약200년생의 팽나무 61그루와 곰솔 9그루, 주엽나무 8그루, 가죽나무 5그루, 예덕나무 32그루가 있다. 또 300~400년 된 84그루의 큰 소나무들도 이루어졌다.
 고려 말에서 조선 중기까지 끊임없이 왜구의 노략질로 골치를 앓던 섬 주민들이 식량을 감추기 위해 동헌과 양곡 창고가 있던 이곳에 소나무를 심어 멀리서 보면 숲으로 보이게 해서 왜적의 표적이 되는 것을 피했다. 지금은 1백m 이상의 노송 숲을 이룬 이곳은 섬 주민들에게 든든한 마음의 방패막이로, 시원한 쉼터로서 사랑을 받고 있다.
◈장병준 묘
 장병준 선생(張柄俊 1893~1972년)은 1919년 무안에서 만세운동을 주도하였다. 이 때문에 일제경찰의 체포령이 내리자 상해로 망명하여 임시정부 의정원 재무부 차장으로 활약하였다. 1920년 군자금을 조달하기 우해 국내로 잠입하여 3.1운동 1주년 기념식 때 서태석, 표성천, 박복영, 고재빈 등과 유달산에 태극기를 꽂고 만세를 주동했다가 체포되어 3년간 옥고를 치렀다. 1927년 신간회 전남도지회 부회장겸 도대표 의원을 맡았고 광복 후에는 한민당 광주지부위원장에 피선되었고, 1957년 민주당 전남도당 위원장이 되었다. 1963년 대통령 표창, 1980년 건국포장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 받았다. 묘는  장산면 대리 137-3번지에 자리잡고 있으며, 신안군 향토자료 제27호로 지정되었다.
◈지명유래
▶오음(五音)마을
 오음산(五音山 208m)이 다섯 봉우리이고 예로부터 노래를 잘 하는 명창이 많이 배출되었으며, 마을 앞 안산(案山)이 장구형으로 소리의 고장이라 하여 오음이라 하였다.
▶시미(是味)마을
 마을 앞에 우물이 있어서 심한 가뭄에도 마르지 않고 물맛이 좋다 하여 시미(匙味)라 하였는데 한자어가 바뀌어 시미(是味)라 부르고 있다. 현재는 우물이 도로로 편입되어 멸실되었다.
▶목에마을
목에마을은 장산목장을 관리하는 목부(牧夫)가 살던 곳으로 목장의 통문이었으며 목장의 말이 도망가지 못하게 지키는 중심지라 하여 목에(항리 項里)라 하였다는 설과, 마을 남쪽 안 고랑이 물이 많아서 장산목장의 말들이 이 곳에서 물을 먹던 곳이라 하여 목계(牧溪) 또는 모개라 하였다는 설이 있다.
▶도창마을
 도창마을은 북쪽 토미산(兎尾山)과 동쪽 부학산(浮鶴山), 서쪽 아미산(阿彌山)이 있다. 에전 조세 창고가 있어 도창(都倉)이라 하였다. 현재는 도창(道昌)이라 한다. 지석묘와 백제석실분 등 문화재가 산재해 있고, 노거수림(老巨樹林)이 도창마을의 뒤편 국도변에 조성되어 있다.
▶사창마을
조세(租稅)를 운반하던 배가 옛날 이 곳에서 환곡(還穀)을 실었으며, 또한 환곡을 보관하던 곳집이 있는 곳이라 하여 사창(社倉), 또는 건너몰이라 하였다.
▶공수(公需)마을
 고려시대 장산현(長山縣)의 공수전(公須田) 토지가 있어 공수촌, 공수라 하였다. 구전에 의하면 마을 뒷산의 모양이 양손을 두르고 있는 형국이어서 공수(拱手)라 하였다고 전하나 현재는 공수(公需)라 한다.
 무형문화재인 ‘장산들노래’가 1981년 제12회 남도문화제에 최우수상, 1982년 제23회 전국민속예술경연대회에서 국무총리상을 수상하였다. ‘하중(夏中)밭매기노래’는 1987년 제16회 남도문화제에서 민요 부분 우수상을 수상하여 농요의 고장으로 이름나 있다.
▶비소(飛巢)마을
 마을 뒷산의 지형이 비소모금(飛巢暮禽), 즉 ‘저녁에 새가 집으로 날아 들어오는 새집 형국’이라 비소(飛巢)라 부른다는 설과, 부유한 마을이 된다 하여 한자어를 비소(肥巢)라 한다는 설이 있다. 비소는 안(內)비소와 밖(外)비소로 있다.
▶다수(多水)마을
 마을 뒤 대성산의 숲이 울창하고 사철 물이 많이 흐른다 하여 다수동(多水洞), 다수라 하였다.
▶성주(城主)골마을
 대성산에는 성(城)이 있어 옛날 성을 관리하는 성주(城主)가 살았던 곳이라 하여 성주골 또는 성자동이라 한다.
▶율도(栗島)마을
 섬의 형태가 밤(栗)모양을 이루고 있으며 옛날 섬에 밤나무가 많이 있었다고 하여 율도(栗島)또는 밤섬이라 한다.

/이민행 대표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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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16/12/16 [13:25]  최종편집: ⓒ rory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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