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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령고蘆嶺鼓 - 함평군 한국전쟁 유해발굴
양민학살은 불갑산에만 자행된 것 아닌 군유산도
 
이민행 대표기자 기사입력  2024/05/22 [22: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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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민학살은 불갑산에만 자행된 것 아닌 군유산도

군유산 토벌작전의 민간인 학살 희생 스쳐 지나가

대보름작전 희생으로 음력 정월 13일 제사 수두룩

신안 비금도 양민 20명 수장 유해 수중 잠들어

함평양민학살 함평읍·학교·신광·손불면 다수 희생

 함평군이 월야면을 주축으로 해보·나산면을 대상지역으로 ‘군경에 의한 민간인 희생사건의 유해발굴 사업’을 시행한다고 한다.

 한국전쟁을 전후해 함평군 민간인 학살은 월야·해보·나산면 등에서만 일어난 것이 아니다. 학교면에서 함평읍에서 신광면에서도 발생했다.

 특히, 신광면 소재 군유산 양민학살 사건은 불갑산 양민학살사건과 같이 군경이 ‘대보름작전’이란 이름으로 수많은 함평군민과 영광군민이 학살된 사건이다.

 또한, 신안군 비금도 바다에 수장된 함평군민 20명도 한분의 유해도 찾지 못하고 70년이 넘는 세월동안 세찬 물결과 함께 물속에 잠들어 있다. 

 한국전쟁(6.25전쟁) 당시 인민군이 점령하고 철수한 후 군경은 ‘대보름작전’이란 작전명으로 1951년 2월 19일(음력 1월 14일) 새벽 군유산 빨치산 토벌작전과 2월 20일(음력 1월 15일) 새벽 불갑산 빨치산 토벌작전을 전개했다.

 1951년 2월 19일 음력 1월 14일 새벽 군인과 경찰은 함평군 신광면 송사리(손불면 및 영광군 염산면·군남면 포함) 주민들을 빨치산으로부터 보호한다는 명목으로 군유산과 산 넘어 ‘마구청’으로 피신시킨 후 산 아래와 정상에서 집단 기관총 등을 발사해 수많은 민간인이 학살되었다고 한다.

 지금은 100세 넘은 고인이 되셨지만 함평군 신광면 송사리 군유산 아래 거주하시던 이백연 씨의 증언(부인 현재 98세로 생존, 당시 상황 모두 기억)에 의하면, 군경이 물러난 후 동이 터 시신 중에 혹여 가족이 있는지 확인해본 시신이 수십명에 달했다고 했다.

 군유산 정월 14일 ‘대보름작전’으로 군유산을 둘러싸고 있는 함평군 신광면·손불면과 영광군 군남면·염산면 등은 음력 정월 13일 제사가 수없이 많았다고 한다.

 필자는 1960년~70년초까지 어렸을 때 시제를 모시기 위해 따라가 군유산 정상 부근에서 산야초 속에 묻혀 있는 무릎뼈 등을 직접 보고 무서워 놀랬던 적이 있을 정도로 유해가 곳곳에서 나뒹굴고 있었다.  

 이백연 씨는 군유산은 빨치산 지리산 연대 불갑산 중대 소속 군유산 소대가 주둔해 활동하고 있었다고 증언했다.

 이 씨는 “경찰은 1950년 빨치산으로부터 보호라는 명목으로 마을 전체를 대나무로 울타리를 설치해 주간에 경찰이 상주하며 출입을 통제했으나, 저녁이면 철수해 밤이 되면 빨치산이 내려와 낮에는 경찰에게 밤에는 빨치산에 시달림을 받으며 온갖 고초를 겪어야만 했다”고 말했다.

 당시 군유산 주변 마을의 주민들 중 일부는 죽창부대로 활동했고, 여맹위원장이 거주해 빨치산 불갑산 중대가 저녁에 가끔 와서 마을 마당에서 훈련도 하던 때라 경찰의 감시가 더욱 심했다고 한다.

 이 씨는 “군유산 토벌작전 당시 정작 빨치산은 모두 어디로 가고 없었고, 당시 생활풍토는 정월보름을 쇠기 위해 잠을 안 자고 날을 새는 세시풍속에 따라 집집마다 불을 켜놓고 있는데 군유산으로 피신하라는 지시로 보름상차림은 하지도 못한 채 입산해 수많은 희생사건이 발생했다”고 말했다.

 또한, 군유산 토벌작전이 있기 전에 경찰이 마을 앞에서 장애인부부를 총살했다고 한다.

 이것뿐이 아니다. 필자는 이백연 씨의 증언에 따라 2015년 6월 신안군 비금도 명사십리해수욕장을 방문했다. ‘함평민간인 집단학살지 표지석’을 보기 위해서였다.

 함평민간인 집단학살지 표지석은 지난 2013년 함평군 지원, (사)함평사건희생자유족회 주관으로 건립되었다. 함평군민 20명이 이름처럼 ‘새가 날며 노는’ 수려한 비금도 명사십리 앞 바다에서 총살된 후 굴비 묶듯 묶어서 바다에 수장해 신신 한 구 찾지 못하고 원혼만 바다를 지금까지 멤 돌고 있다. 수장된 후 가족이 무서워 뿔뿔이 흩어져 버려 현재 6분의 후손만이 비금도를 찾는다고 한다.

 비금도 집단 학살은 국가에서 인민군에 부역한 사실이 있는 사람이 자진신고하면 구해준다고 하여 스스로 신고한 사람들을 ‘국민보도연맹’이란 이름을 붙이고 구제해주기는커녕 전국에서 집단 학살이 자행되고 있는 가운데 1950년 7월 13일 신안 비금도에서 함평 보도연맹원을 학살한 사건이다.

 노무현 대통령은 지난 2008년 보도연맹 학살사건을 ‘정부의 공권력에 의한 불법적 학살’이라고 인정하고 희생자와 유족들에게 공식 사과했었다. 이후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는 2009년 ‘국민보도연맹 사건은 불법적인 학살’이라고 발표했다.

 함평양민학살 하면 월야면만이 군수가 바뀔 때마다 매번 등장한다. 함평양민학살이 월야면에서만 발생된 사건이 아님을 바로 알고 정치적 함의를 담고 하는 정치행위가 아니길 바랄 뿐이다.

 부처님은 “우주는 생각하는 대로 존재하며, 모든 것은 생각과 함께 시작되고, 생각에 따라 세계가 만들어진다”고 말씀하셨다. 억울하게 희생당하고 후손은 죄인 아닌 죄인 되어 70년 세월을 보내고 있다. 원혼들의 생각을 상기하며 그 생각으로 새로운 세상을 열어보자.

/이민행 대표·편집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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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24/05/22 [22:24]  최종편집: ⓒ rory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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