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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漢字)의 기원 (1-2부)
중국에서 만든 문자가 아니다…단군왕검 때 만든 문자이다
 
성현 칼럼리스트 기사입력  2011/07/31 [20:46]
 

한자는 고대중국에서 만든 문자가 아니다 -1부
중국어 발음은 한자가 중국에서 만든 문자가 아니라는 결정적 증거

 대한민국 국민 대부분은 소리글자인 한글은 우리가 만들었고, 뜻글자인 한자(漢字)는 중국에서 만든 문자로 알고 있다.
  우리나라 한글학자들은 “한자는 중국의 한족(漢族)이 만든 것이며 우리가 B.C 3세기경부터 차용한 것이다.”라면서 아무런 고증 없이 동이족(東夷族)이 한자를 만들었다는 학설 자체를 극력 부정하고 있다. 과연 그럴까?
  먼저 몇 가지 일화와 학자들의 주장을 예로 들고 한자의 기원에 대해 알아보기로 하겠다.
▲1) 해방 후 대한민국의 초대 문교부장관을 지낸 안호상 박사가 재직 시 중국의 저명한 문학자이며 평론가인 임어당(林語堂)선생을 만나 여담으로 “중국이 한자를 만들어 놓아 한자를 사용하는 우리나라까지 문제가 많다”고 하자, 임어당 선생은 “그게 무슨 말입니까? 한자는 당신네 조상인 동이족이 만든 문자인데 그것도 모르고 있소?”라는 핀잔을 들었다고 한다.
▲2) 한글재단 이사장인 한갑수 선생이 미국 공군 지휘참모대학에 입교했을 때, 같은 입학생인 대만학자 서량지(徐亮之) 박사가 한 박사를 찾아와 이렇게 말했다. “한(韓)민족은 우리 중국보다 더 오래된 역사를 가진 위대한 민족으로서 문자를 창제한 민족인데, 우리 중국인이 한민족의 역사가 기록된 포박자(抱朴子)를 감추고 중국역사로 조작하는 큰 잘못을 저질렀으므로 본인이 학자적 양심으로 중국인을 대표하여 사죄하는 뜻으로 절을 하겠습니다. 받아주십시오.”하고는 한국식으로 넙죽 큰 절을 올렸다 한다. 서량지 박사는 중국내 금서(禁書)인 동인의 저서 <중국사전사화(中國史前史話)>를 통해 중국 고대사를 동이족의 것으로 인정한 학자이다.
  또한, 서량지 박사는 “중국의 책력법(冊曆法)은 동이(東夷)에서 시작되었다. 책력을 만든 사람은 희화자(羲和子)이다. 그의 혈통은 은(殷)나라, 상(商)나라의 동이족(東夷族) 조상이다. 동이가 달력을 만든 사실은 실로 의문의 여지가 없다.”라고 말했다.
▲3) 중국학자 필장복은《중국인종북래설(中國人種北來說)》에서 “중국 문자가 만들어진 것은 필시 중국 중원에서 시작된 것이 아니다. 그 계통은 멀리 추운 북방에서 시작된 것을 계승한 것이다.(中國文字之制作 必非始于中國中原 而係遠始于寒的北方)”라고 말하고 있다.
▲4) 중국 사학자 왕옥철(王玉哲)은 한자의 연원을 지금부터 6,000년 전 산동성 일대의 동이족 문화의 일원인 대한구시대(大汶口時代)로 소급하고, 여기서 다시 3,400년 전 은(殷)나라의 갑골문자(甲骨文字)로 발전한 것이라고 했다.
▲5) 대만 문자학자 이경재(李敬齋)도 동이족이 한자(漢字)를 창조했다면서, 순(舜)임금과 한자를 만들었다는 창힐(蒼?)도 동이족이며 공자(孔子)도 동이족인 은나라 후예라는 주장 등 상당수 중국학자들은 은(殷)대의 갑골문이 당시 황하 이북의 북방민족인 동이족이 만들었다고 이구동성으로 주장하고 있다.

▲ 현 한자의 모태로 추정되는 문자들. 왼쪽부터 낭하리 암각화(녹도문), 영변 묘향산 옛비석(녹도문), 창힐문자, 우측 상단은 요녕성 출토 토기 (녹도문), 우측 아래는 갑골문자 ▲역사복원신문


◈한자(漢字)라는 명칭 과연 옳은가?
  일본이나 우리나라가 한자(漢字)라고 표기하기 있어 마치 한자는 한나라 때 한족(漢族)이 만든 문자라고 착각하기 쉽다. 그러나 한나라 때보다 훨씬 이전인 진(秦)나라, 주(周)나라를 지나 은(殷)나라 때 이미 비슷한 문자가 사용되었으며, 한고조(漢高祖) 유방(劉邦) 이후에야 한족(漢族)이 나왔음에도 불구하고 그 이전에 만들어진 글자를 한자라고 표기하는 것은 근본적인 문제가 있다고 하겠다. 즉 이는 한족에 의해 저질러진 명백한 역사왜곡인 것이다.
  한자(漢字)라는 것을 구체적으로 언급한 기록은 <원사(元史>에서 ‘한자의 책을 만들었다.’고 언급된 이후, <중문대사전(中文大辭典)>에서도 “한자는 한족이 쓰는 문자로 몽고문자에 대칭해서 말한 것”라는 설명으로 미루어보아, 한나라 때에는 한자라는 말 자체가 없었음에도 지금 쓰는 한자라는 명칭이 얼마나 잘못된 것인가를 알 수 있다 하겠다.
  일본학자 가지마 노보로는 “한족(漢族)은 한(韓)을 흉내 내어 이름붙인 것이며, 특히 양자강 유역은 전통적으로 동이족의 것이다”라고 말한 적이 있으며, 심지어 중국도 자신들의 최고신화인 반고개천(盤古開天)과 한족(漢族)의 기원을 규명한 학술연구지에서 “한족은 동이족을 주류로 묘족을 지류로 구성되었다”고 설명하고 있다.
  집을 뜻하는 가(家)라는 글자도 집안(?)에서 돼지(豕)를 키운다는 의미로, 뱀의 천적인 돼지를 집안에서 키워 파충류의 습격을 막은 동이족의 지혜였던 것을 중국학자들은 아직 밝히지 못했는데 아직까지 우리에게 집안에 돼지를 키우는 풍습이 남아있다. <조영언 ‘노스트라트 어원여행’>
  태양을 의미하는 일(日)자는 갑골문에도 가운데 점이 찍혀 있는데 이는 남방문화에서는 찾을 수 없고, 해 가운데 금가마귀(金烏)를 그린 북방문화(고구려 벽화)에서만이 그 해답이 나온다.
  갑골문(甲骨文)에 의하면, 한자의 문(文)은 사람이 가슴에 문신을 한 의미이고, 글 자(字)는 집안에서 아이를 낳는다는 의미였고, 文은 춘추시대(B.C 770-403)에 字는 진시황 때(B.C 219) 이르러 비로소 글자의 뜻으로 쓰여졌을 뿐이다.
◈중국어의 발음으로 본 한자의 기원은?
  중국어의 발음을 보면 한자는 고대 중국에서 만든 문자가 아니라는 것을 쉽게 알 수 있다.
▲1) 먼저 중국어는 받침 발음이 n(ㄴ), ng(ㅇ)밖에 없고 er(얼)이 유일한 r(ㄹ) 받침이다. 그래서 중국어로는 영어 발음이 잘 되지 않는다. 이는 일본어도 마찬가지이다. 이 두 언어는 영어의 한 발음을 두 개의 발음으로 말하는 경우도 있다.
▲2) 또한 중국어는 모음이 하나인 경우도 있지만, 복수모음이 많이 있다. 예를 들어
▲西(서) : xi (시) ▲書(서) : xie (시에) ▲小(소) : xiao (시아오 또는 샤오) 그 외 중국어의 복수모음들의 예이다. ▲ai(아이) ▲ei(에이) ▲ao(아오) ▲ou(어우) ▲ia(이아, 야) ▲ua(우아, 와) ▲iou(이오우 또는 유~) ▲uai(와이) ▲uei(웨이) ▲iue(위에)
  원래 하나의 발음은 하나의 글자로 표시되어야 한다. 문자를 만들 때 하나의 글자를 놓고 두 개의 소리로 발음하는 경우는 없다. 즉 두 개의 소리를 하나의 문자로 표시하는 경우가 없다는 말이다. 그런데 중국어는 한 글자를 놓고 2~3번 발음하는 경우가 많다.
  위와 같이 중국어에 복수모음이 있다는 것은 중국에서 한자를 만들지 않았다는 결정적인 증거이다. 2-3 번 발음을 하나의 글자로 표현하는 법은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원래 동이족의 사용하던 문자를 가져다가 자기네가 쓰면서 글자 하나를 놓고 위와 같이 자기네 말대로 2~3번 발음한 것으로 보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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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漢字)의 기원은 단군왕검 때 만든 문자 -2부
중국이 주장하는 한자의 기원은 명백한 역사왜곡

  중국은 현재 쓰고 있는 문자인 한자를 황제헌원(黃帝軒轅) 때 창힐(倉?=동이족東夷族)이 새와 짐승들의 발자국을 보고 창안한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공자의 7대손 공빈(孔斌)이 쓴 아래 <동이열전(東夷列傳)>의 기록에 따르면, 헌원(軒轅)이 스승인 동이(東夷)의 자부선인(紫府仙人)에게 녹서(鹿書=녹도문자鹿圖文字)로 된 내황문(內皇文=삼황내문경三皇內文經)을 배워왔으므로 그러한 중국의 주장은 허구임을 알 수 있다.
  《東方有古國 名曰東夷 星分箕尾 地接鮮白 始有神人 檀君 遂應九夷之推戴而爲君 與堯병立 虞舜 生於東夷 而入中國 爲天子至治 卓冠百王 紫府仙人 有通之學 過人之智 黃帝受內皇文於門下 代炎帝而爲帝동방에 오래된 나라가 있는데 동이(東夷)라 한다. 훌륭하신 분인 <단군>이 계셨는데 구이(九夷)의 추대를 받아 임금이 되셨다. 요(堯)임금 때의 일이다. 순(舜)임금은 동이에서 태어나 중국으로 와서 임금이 되어 훌륭한 정치를 하였다. 동이(東夷)에는 자부선인(紫府仙人)이라 하는 훌륭한 분이 계셨는데 ‘황제헌원’이 문하에서 내황문(內皇文)을 배워와 ‘염제신농(炎帝神農)’의 뒤를 이어 중화의 임금이 되었다.》
  위의 기록을 <태백일사(太白逸史) 소도경정본훈>에서는 다음과 같이 상세하게 설명해주고 있다. “<삼황내문경(三皇內文經)>은 자부선생이 헌원에게 주어 그로 하여금 마음을 씻고 의로움(義)으로 돌아오게 한 것이다. 선생은 일찍이 청구국(靑丘國=배달국) 대풍산(大豊山)의 남쪽에 있는 삼청궁(三淸宮)에 사셨다. 헌원이 몸소 치우천황(蚩尤天皇)를 배알했는데 가는 길에 명화(지명)를 거치게 되어 소문을 듣게 된 것이다. 경문(經文)은 신시(神市)의 녹서(鹿書)로 기록되어 세 편으로 나뉘어져 있다. 후세 사람들이 추연(追連)하고 주(註)를 더하여 따로 신선음부(神仙陰符)의 설(卨=은나라 조상)이라고 한 것이다.”
  따라서 위 기록은 황제헌원 이전에 이미 녹서(녹도문자)라는 문자가 존재하고 있었음을 말해주고 있다. 이 문자는 배달국 1대 환웅천왕(桓雄天王) 때 만든 태고문자(太古文字)이다.
  <태백일사 신시본기>에 따르면 “환웅천왕이 신지 혁덕(神誌 赫德)에게 명하여 문자를 만들게 하였다. 신지는 명령을 전하는 직책을 맡고 출납하는 임무를 전담하고 있었는데, 모든 명의 출납을 육성에 의존했을 뿐 문자로 기록하는 방법이 없었다. 어느 날 사냥을 나갔는데 암사슴을 보고 활을 쏘려했으나 우물쭈물하는 사이에 종적을 놓치고 말았는데, 사방을 수색하다가 사슴의 발자국을 찾게 되어 사슴이 도망간 곳을 알게 되었다. 이에 ‘기록으로 남기는 법은 오직 이것뿐이다.’라고 크게 깨닫고는 만물의 모양을 관찰하여 문자를 만들게 되었다. 이를 태고문자의 시작이라 한다. 그런데 그 문자는 편리하지 못했기 때문에 후세에 와서는 다 사라져 존재하지 않게 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태고문자는 한자처럼 형상을 나타내는 문자로 사슴 발자국을 보고 만든 녹도문자 즉 녹서(鹿書)임을 알 수 있다.
  또한 <태백일사 소도경전본훈>에 의하면, “신시에는 녹서(鹿書)가 있고, 태호복희(太昊伏羲)에게는 용서(龍書), 자부선인(紫府仙人)에게는 우서(雨書), 치우(蚩尤)에게는 화서(花書), 단군(檀君)에게는 신전(神篆)이 있었으니, 이들 글자는 널리 쓰여졌다. (중략) 지금 그 글자의 근원으로 삼는 것을 보면 모두 신시에서 전해진 법이며 지금의 한자도 그 지류를 계승한 것이 명백하다.”로 기록되어 있어 신시시대에 상형문자가 만들어진 이후 여러 번 글자모양이 바뀌었는데 사용이 불편하여 나중에는 다 없어졌다고 하는데 그 때는 과연 언제일까?
  위 기록에서 보듯이, 황제헌원은 환웅천왕 때 만들어진 녹서를 동이(東夷)의 자부선인에게 배워다가 썼을 뿐인데 어찌 헌원의 신하 창힐이 지금 한자의 기원인 문자를 만들었다는 말도 안 되는 역사왜곡을 하고 있는지 모르겠다. 또한 중국은 은나라 유적지에서 발견된 갑골문(甲骨文)을 현 한자의 기원이라고 말하고 있는데, 이 역시 대단히 잘못된 주장이다.
  <태백일사 소고경전본훈>에 따르면, “천부경(天符經)은 천제 환국(天帝 桓國)에서 말로만 전해지던 글로 환웅께서 하늘에서 내려온 뒤 신지 혁덕에게게 명하여 녹도(鹿圖)의 글로써 이를 기록케 하였다. 최치원이 일찌기 신지의 전문(篆文)을 옛 비석에서 보고 다시 이를 첩(帖)으로 만들어 세상에 전하게 된 것이다.”라는 설명이 있다.
◈단군왕검(檀君王儉)에 의한 문자 창제
  그렇다면 지금의 한자는 과연 누가 만들었을까? 그 기록을 보기로 하겠다.
  《단군세기 원문에, 왕검께서는 명을 내려 팽우(彭虞)에게 토지를 개간하게 하시고, 성조(成造)에게 궁실을 짓게 하시고, 고시(高矢)에게는 농사를 장려하도록 맡기셨고, 신지(臣智)에게 글자를 만들게 하셨다. 기성(奇省)에게는 의약을 베풀게 하시고, 나을(那乙)에게는 호적을 관장하게 하시고, 희(羲)에게 괘서를 주관하게 하시고, 우(尤)에게 병마를 관장하게 하셨다. 비서갑(非西岬)에 사는 하백(河伯)의 따님을 맞이하여 황후로 삼고 누에치기를 맡게 하시니, 백성을 사랑하시는 어질고 후덕한 정치가 사방에 미치어 태평해졌다.》
  위 기록에서 보듯이 인류 역사상 가장 위대했던 나라였던 조선대연방(朝鮮大聯邦)을 세운 단군왕검(檀君王儉) 때 새로운 문자가 창제되기에 이른다. 단군왕검께서 신지(臣智)에게 명하여 문자를 만들라고 명하였는데 이 문자가 배달국에서 대대로 내려오던 녹서를 개량한 것인지 아니면 획기적인 새로운 문자였는지는 확실치는 않으나 이 문자가 지금 한자의 기원이 아닌가 한다.
  그리고 신시시대(神市時代)에 만들어진 문자가 사용이 불편하다보니 다 없어졌다고 하는데 그 시기는 단군왕검 때로 보이며, 이전보다 훨씬 편리한 새로운 문자를 만들었기 때문일 것이다. 또한 나을(那乙)에게 호적을 관장하게 했는데, 이는 편리한 문자가 없으면 불가능한 일인 것이다.
  67년 갑오(B.C 2267년) 단군왕검께서는 제후인 순임금의 나라에 홍수가 크게 나자 태자 부루(太子 扶婁)를 파견하여 도산(塗山)에서 순임금이 보낸 우사공(虞司空)을 만나 오행치수(五行治水)의 방법을 전하여 주었다고 한다.
  이 사실은 <태백일사 소도경전본훈>에도 기록되어 있다. “창기소라는 사람이 자부선생이 만든 칠성력의 법을 재연하여 이로써 ‘오행치수’의 법을 밝혔다. 순임금 사람인 사우(하나라 시조)는 회계산에 이르러 조선으로부터 가르침을 받고 자허선인을 통해 창수 사자 부루(왕검의 태자)에게 뵙기를 청하여 <황제중경(黃帝中經)>을 받으니 이것이 신시황부의 중경이다. 우임금이 이를 취하여 쓰니 치수에 공이 있었다.” 이 역시 단군왕검 때 만든 편리한 문자가 없었다면 아마 불가능한 일일 것이다.
  또 2세 부루단군(扶婁檀君) 10년 경술(B.C 2231년) “밭을 나누고 밭문서를 만들어서 백성들로 하여금 사사로운 이익을 구하지 않도록 하였다.”라는 기록이 있는데 밭문서를 만들 정도로 대중적으로 사용하기 편리한 문자가 없었다면 불가능한 일일 것이다.
  3세 가륵단군(嘉勒檀君) 2년 경자(B.C 2181년) “지방마다 서로 말이 틀리고 형상으로 뜻을 나타내는 참글(眞書)이 있다 해도, 열 집 사는 마을에도 말이 통하지 않는 경우가 많고 백 리 되는 땅의 나라에서도 글을 서로 이해키 어려웠다. 이에 삼랑 을보륵에게 명하여 정음(正音) 38자를 만들어 이를 가림토(加臨土)라 하니 그 글은 다음과 같았다.”라는 기록으로 보아 가림토문자가 나오기 이전에는 상형문자인 진서(眞書=한자)로 모든 문서를 쓴 것으로 보인다.

▲ 3세 가륵단군 때 상형문자인 진서가 불편하여 소리글자 38자를 만들었다 ▲역사복원신문


  1년 후인 B.C 2180년 “신지 고글에게 명하여 <배달유기>를 편수케 하였다.”는 기록이 있는데, 지금도 역사책이란 소리글자인 한글전용으로 쓰기가 어려운 법이라 당시 일년 전에 만든 소리글자인 가림토 문자로 배달유기라는 역사책을 편찬한 것 같지는 않고 아마 뜻글자인 진서(한자)로 편찬했을 것으로 보인다.
  이 정도로 단군조선 초기에 광범위하게 문자가 쓰인 것으로 보아 그 문자는 예전보다 훨씬 사용하기 편한 것으로써, 사용하기 불편한 녹서(鹿書)를 대폭 개량한 획기적인 상형문자인 진서(眞書)를 단군왕검 때 새로 만들었을 가능성이 큰 것으로 보인다. 이것이 지금 한자의 기원이 아닌가 생각된다. 물론 진서의 오리지날은 배달국 환웅천왕 때 신지 혁덕이 만든 녹서(鹿書)일 것이다.
  중국에서는 은나라 때의 갑골문자가 현 한자의 기원이라고 하나, 하(夏)나라와 은(殷)나라도 동이족의 나라였으니 이 또한 모두 단군왕검의 후손들인 것이다. 중국 사학자들의 공동저서인 <고사변>에 따르면, “현조(玄鳥=검은새)는 은나라와 동이족의 조상신이다. 동이와 은나라 사람은 같은 종족이며 그 신화 역시 근원이 같다. 태호 복희(太昊 伏羲), 천제 제준(天帝 帝俊), 소호 금천(少昊金天), 제곡 고신(帝? 高辛), 제순(帝舜=순임금) 그리고 은나라 조상인 설(卨) 등이 동이족과 같다고 하는 것은 근래 사람들이 명확히 증명하는 바이다.”라고 기술되어 있다. 참고로 은나라는 단군왕검이 조선을 세운 이후 약 600년 후에 동이족에 의해 세워지는 나라이다.
  그들이 원래 있던 편리한 문자를 안 쓰고 새로운 문자를 창제해 썼을 리가 없다. 게다가 은나라 때 문자를 만들었다는 어떤 기록도 없고 단지 1899년 하남성 은허(殷墟)에서 갑골문자 유물이 발굴되었을 뿐이다. 단군조선은 이들 나라와 서로 가깝게 있었기 때문에, 단군왕검 때 만든 문자(진서)를 은나라가 가져가 쓰다가 그것이 갑골문자로 남겨져 유물로 출토된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 왼쪽은 산동성 창러현에서 발견된 골각문자로 가운데 은나라 갑골문자보다 천년이나 빠르다. 산동성은 대대로 동이족의 영토였다.  ▲역사복원신문


  산동성 창러현(昌樂縣)에서는 갑골문보다 1,000년이나 앞서는 골각문자가 발견되었다. 중국 언론에 따르면, 중국 고고학자들이 “당시 산둥지역은 한민족을 포함한 동이(東夷)족들이 집단으로 거주했기 때문에 이 골각문자는 동이문자로 봐야 한다.”고 주장했고, “문자의 모양도 고대 상형문자인 동이문자 계열에 속한다. 은허 지역에서 발견됐던 갑골문자도 동이족의 골각문자가 발전한 형태일 가능성이 크다”고 강조했다.
  즉 각골문자는 배달국의 녹서(鹿書)로 보이며, 갑골문자는 단군왕검 때 만든 진서(眞書)로 보인다. 은허에서 발견된 갑골문자는 은나라의 유물이 아니라 오히려 단군조선의 유물일 가능성도 있다. 왜냐하면 갑골문자가 발견된 하남성 안양현도 단군조선의 영토였을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성훈 칼럼리스트
◈성훈 칼럼리스트 프로필
▲본명 성헌식(成憲植) ▲역사운동가 ▲민족혼 되찾기 대표 ▲역사복원신문 편집인

 
기사입력: 2011/07/31 [20:46]  최종편집: ⓒ rory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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