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업설의 내용
불교의 십업설(十業說)은 인(因)과 율(律)에 입각한 실천윤리라고 말할 수가 있다. 업(業, karma)이라는 술어는 ‘작위(作爲)’나 ‘일’을 나타내고, 보(報, vipaka)는 ‘이숙(異熟)’이라고도 번역되고 있듯이 ‘성숙함’을 나타낸다.
이 두 낱말은 불교에서만 쓰이는 것이 아니라, 우파니샤드 철학이나 이 계파에서도 중요한 교리적 개념으로 사용되고 있었다. 그러나 석가모니께서는 그 두 술어를 특히 인간의 의지적 작용과 그에 대한 객체의 필연적 반응 을 나타내는 말로 채택하셨다.
業과 報 사이에는 직접적인 인과관계가 있으므로 그들의 성질 또한 동일성을 띠게 될 것은 물론이다. 즉 업인(業因)이 선(善)이면 과보(果報)도 선, 악(惡)이면 과보도 악의 성질을 띠게 된다는 말이다.
따라서 불교에서는 “선업에는 즐거운 보(선보善報)가 따르고, 악업에는 괴로운 보(악보惡報)가 따른다.”고 설한다. 어떤 경우에는 더 명확하게 다음과 같이 설해져 있다. “흑업(黑業악한 업)에는 흑보(黑報)가, 백업(白業 착한 업)에는 백보(白報)가, 흑백업(黑白業악업과 선업이 서로 뒤섞여서 있는 것)에는 흑백보(黑白報)가 따르고, 불흑불백업(不黑不白業흑백의 상(相)을 여윈 것=무루업(無漏業))에는 보(報)가 없다."<중아함 권 27 達梵行經>
업(業)이란, ▲순현업(順現業 금생에 업을 지어 이 세상에서 그 과보를 받는 것)▲순생업(順生業 현세에 선·악의 행위를 지어 오는 세상에 과보를 받는 것)▲순후업(順後業 현세에 지은 행업으로 제3생 이후에 받는 과보)▲부정수업(不定受業 결과를 받을 시기가 일정치 않은 업)▲흑업(黑業 욕계의 악업은 업의 성질도 좋지 못하고, 받는 과보도 나쁜 업)▲백업(白業 백은 선善이란 뜻. 곧 색계의 선업. 색계의 선업은 그 업의 성품도 선하고, 과도 청정)▲흑백업(黑白業 악업과 선업이 서로 뒤섞여서 있는 것)▲불흑불백업(不黑不白業 흑백의 상相을 여윈 것) 등을 뜻한다.
不黑不白業이란 “작용된 것이 아니므로 보가 없다”고 할 것은 물론이다. 왜 그러냐면 불교에서는 인간의 의지적 작용만을 업으로 보고 있으므로 “의지가 작용되지 않는 업(불고작업不故作業)은 보를 받지 않는 것이다.”<중아함 권 3 思經>
이와 같이 선업에는 ‘즐거운 보’가 따르고 악업에는 ‘괴로운 보’가 따른다면 우리의 행동 방향은 마땅히 악을 여의고 선을 행하는 길로 나아가야 할 것이다. 괴로움보다는 즐거움을 바라는 것이 인지상정인데, 즐거움을 가져오는 것은 자신의 선업 이외에 다른 길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금까지 우리는 어떻게 행동해 왔는가? 善業보다는 惡業을 익혀왔음이 사실이다. 행복하게 살 것을 바라면서도 불행을 가져오는 악업을 일삼아 왔으니, 이 얼마나 어리석은(치암痴暗) 일인가? 괴로운 상황에서는 선보다 악을 행하기가 더 쉬워 일단 악에 빠지면 끝없는 악의 순환이 있게 된다.
인간의 이러한 무지를 타파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먼저 惡業을 타파하는 일에서부터 착수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따라서 석가모니께서는 먼저 악업부터 설명하고 계신다. “몸으로 세 가지 惡業을 짓고 괴로운 報를 받나니, 그것은 곧 ▲살생(殺生)▲투도(偸盜)▲사음(邪淫)이다. 입(言語)으로 네 가지 악업을 짓고 괴로운 보 받나니, 그것은 곧 ▲망어(妄語 거짓말)▲양설(兩舌 두 말)▲악구(惡口 욕지거리)▲기어(綺語 꾸밈말)이다. 의지로 세 가지 악업을 짓고 괴로움을 받나니, 그것은 곧 ▲탐욕(貪欲 욕심)▲진에(嗔? 성냄)▲치암(痴暗 어리석음)이다.”<중아함 권 3 思 經>
이상 열 가지를 십악업(十惡業)이라고 하는데, 십악업의 부정은 곧 십선업(十善業)이 될 것이다. 따라서 십선업은 따로 시설하지 않고 십악업에 부정 접두사 ‘불(不, a)’을 덧붙여 이를 표현함이 보통이다.
즉 몸으로 짓는 세 가지 선업은 ▲불살생(不殺生)▲불토도(不偸盜)▲불사음(不邪淫)이고, 입으로 짓는 네 가지 선업은 ▲불망어(不妄語)▲불양설(不兩舌)▲불악구(不惡口)▲불기어(不綺語)이고, 의지로 짓는 세 가지 선업은 ▲무탐(無貪)▲무에(無?)▲무치(無痴)이다.<잡아함 권28>
十善業을 적극적인 개념으로 표현하는 경우도 물론 없지 않다. 가령 불살생은 방생(放生)으로, 불투도는 보시(報施)로. 그러나 십악업의 반대 개념으로 표현하는 것이 보통이다.
몸으로 짓는 삼업(三業)과 입으로 짓는 사업(四業)과 의지로 짓는 삼업 가운데서, 근본이 되는 것은 의지로 짓는 삼업이다. 業은 본래 의지에서 발생하여 언어 또는 신체적 행동으로 나타나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계파가 신벌(身罰)을 가장 중한 것으로 보는 데에 대해서 불교에서는 의업(意業)을 가장 중한 것으로 본다.<중아함 권 32 優婆離經>
어떤 경우에는 意業을 사업(思業, cetana-karma)이라 하고, 구업(口業)·신업(身業)을 사이업(思已業, cetayitva-karma)이라고 하는데, 이것 또한 意業의 근본이 되는 것을 말해 주고 있다.
불교에서 설하고 있는 선·악업의 구체적인 내용은 이상과 같거니와, 여기에서 우리는 불교의 가장 기본적인 사회윤리를 엿 볼 수가 있다. 윤리학에서는 선악의 판별 기준을 어디에다 둘 것인가가 중요한 문제로 된다.
불교의 업설(業說)에서는 그것이 전적으로 인간의 자유의지에 맡겨져 있음을 볼 수가 있다. 그러 나 十業의 내용을 볼 때 그 중의 어느 하나라도 인간의 사회생활과 무관한 것은 없다. 이것은 선악의 판단은 각자의 의지에 맡겨져 있지만, 사회 윤리적 측면에서 고려되고 있음을 나타낸다. 뿐만 아니라 업에는 반드시 보가 따른다는 것이므로 사회적 책임(보報)이 또한 깊이 의식되고 있다고 말할 수가 있다.
불교의 업설은 이렇게 매우 합리적인 사회윤리의 성격을 띠 고 있는데, 실제적인 우리의 현실을 보면 이따금 이러한 불교의 업설이 문제성을 던져 줄 때가 있다. 업설의 합리적 인(因)과 율(律)로는 설명되지 않는 현상이 나타날 때가 있기 때문이다.
가령 구체적인 예를 들면, 어떤 사람은 극악한 일을 저질렀는데도 잘 살고 있는가 하면, 어떤 사람은 선한 일만 하는데도 일생을 불우하게 살다가는 경우를 볼 수가 있다. 십업설의 인(因)과 율(律)에서 볼 때 이런 현상은 ‘문제의 현상’이라고 하지 않을 수가 없다.
업보(業報)의 因과 律로는 해명되기 어려운 이러한 ‘문제의 현상’에 대해 사람들은 다른 원리에서 그 원인을 찾고자 한다. 유신론자(有神論者)는 신(神)의 뜻에서, 운명론자(運命論者)는 운명(運命)에서, 우연론자(偶然論者)는 우연(偶然)에서 그 원인을 찾을 것이다. 그들의 설명은 매우 이해하기 쉬우므로 곧 사람들의 호응을 받아, 현재 우리 주변에서도 보이는 바 와 같이 크게 행해지게 된다.
그러나 깊이 생각해 보면 그러한 설명들은 문제를 더욱 미궁 에 빠뜨리고 있다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그들의 견해에 의하면 이 세계에 일어나고 있는 현상에는 인간의 업인(業因)에 의한 것과 그렇게 않은 원인(神, 運命, 偶然)에 의한 것과의 두 가지 현 상이 있게 된다.
그렇다면 어디까지가 인간이 한 일이며 해야 할 일인가가 모호하게 되어 버린다. 이런 문제성에서 만일 모든 현상이 신이나 운명, 우연 등의 원인에서 오고 있다고 하면, 이번에는 인간에게 자유의지나 욕심, 노력 등이 있는, 또는 있어야 할 이유가 수긍할만하게는 설명되지 않을 것이다.<중아함 권3 度經>
그렇다면 불교에서는 그런 문제를 어떻게 보고 있는가? 냉철한 현실 관찰과 합리적인 사유를 중요시하는 불교에서는 그러한 현상도 업보의 일종으로 보아야 한다는 입장에 서 있다. 왜 그러냐면, 십이처설(十二處說. 일체의 마음의 작용이 일어나게 하는 근거가 되는 곳. 眼耳鼻舌身意色聲香味觸法)은 “일체 존재(현상)는 십이처에 들어가고, 그 이외의 경계는 있을 수가 없다.”고 분명히 했기 때문이다.
석가모니께서는 “바라문(婆羅門. 승려 최고계급)이여, 일체는 십이처에 포섭되는 것이니, 곧 눈과 색, 귀와 소리, 코와 냄새, 혀와 맛, 몸과 촉감, 의지와 법이다. 만일 이 십이처를 떠나 다른 일체를 시설코자 한다면 그것은 다만 언설일 뿐, 물어 봐야 모르고 의혹만 더할 것이 다. 왜 그러냐면 그것은 경계(境界)가 아니기 때문이다.”라고 하셨다.<잡 아함 권 13>
또한 석가모니께서는 “삼명(三明)을 갖춘 바라문(婆羅門)으로서 일찍이 한 사람이라도 범천(梵天)을 본 자가 있는가? 만일 본 일도 없고 볼 수도 없는 범천을 믿고 받든다면, 마치 어떤 사람이 한 여인을 사랑한다고 하면서 그의 얼굴을 본 일도 없고 이름도 거처도 모른다는 것과 무엇이 다르리요.”고 說하셨다.<장아함 권 16. 삼명경>
이렇게 볼 경우 불교의 業說은 삼세업보설(三世業報說)로 전개된다. 문제의 현상을 분석해 보면, ▲1. 현재 업인(業因. 선악의 과보를 일으키는 원인이 되는 행위)이 있는데 그 과보(果報. 인과응보)가 나타나지 않을 경우 ▲2. 果報는 있는데 그 業因이 현재 발견되지 않을 경우 등의 둘로 갈라진다. 이러한 두 경우를 업설에 의해 합리적으로 설명한다면, 1의 경우는 그 과보가 현 세의 이후에 즉 내세(來世. 미래의 생)에 있을 것이라고 볼 수밖에 없고, 2의 경우는 그 업인이 현세의 이전에 즉 숙세(宿世. 전생)에 있었다고 볼 수밖에 없게 된다. 따라서 석가모니께서는 다음과 같이 설하고 계신다. “만일 고의로 업을 지음이 있으면 반드시 그 보를 받나니, 현세에 받을 때도 있고 내세에 받을 때도 있다.” <중아함 권 3 思經>
불교의 업설은 이렇게 삼세업보설로 전개되므로, 사후 내세 에 가서 받을 업보에 대해서도 언급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불교의 육도윤회설(六道輪廻說)은 바로 이러한 필요성에서 나온 것으로 생각된다. 육도(六道)의 도(道, gati)는 ‘취(趣)’라고도 번역되는데, ‘가는 곳’을 가리킨다. 즉 ▲지옥도(地獄道)▲아귀도(餓鬼道)▲축생도(畜生道)▲아수라도(阿修羅道)▲인간도(人間道)▲천상도(天上道) 등의 여섯 가지를 시설(施設) 한 것을 六道라고 한다. 아수라(阿修羅)를 빼고 오취(五趣)를 헤아릴 경우도 있다. 육도에서 앞의 셋을 악업에 대한 악취도(惡趣道=三惡道), 뒤의 셋을 선업에 대한 선취도(善趣道=三善道)라고 한다.
◈업설의 평가
이상 소개한 것이 불교의 삼세업보, 육도윤회설의 대강인데, 이것은 실천적 인간의 시야(視野)를 현세의 테두리를 벗어나 무한한 시공(時空) 속에 펼치게 하며, 악을 멸하고 선을 행하는 강력한 의지 적 인간상을 부각시킨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업설은 종래 학계에서 올바른 이해를 받지 못한 경우가 있을 뿐만 아니라, 심지어는 진정한 불교 교리가 아니라는 평가를 받은 일도 있다.
업설에 대한 그러한 부정적 평가 중에 첫째로서 우리는 업설을 단순한 숙명론으로 보려는 견해를 들 수가 있다. 업설은 현세의 괴로움을 숙세(宿世)의 인연(因緣)으로 돌리고 체념하라는 입장이라는 것이다. 현재 받고 있는 괴로움이 숙세의 업인에 의한 것도 없지 않음은 물론이다. 그러나 불교 업설의 목적은 그것을 체념하는 데에 있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의 의지력으로 그것을 극복하려는 미래지향적인 인생관에 목적이 있음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둘째, 불교의 업설은 사람들에게 선행을 권장하려는 통속적인 ‘교화방편설(敎化方便說)’이라고 평가하는 학자도 있다. 그 이유는 업설이 불교의 무아설(無我說)과 모순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견해는 업설 뿐만 아니라 무아설에 대해서도 올바로 이해 가 된 것이라고는 볼 수가 없다. 불교의 무아설은 앞서 십이연기설의 중도설(中道說)에서도 언급한 바와 같이 無明妄念에 실재하는 아(我)가 없다는 것이지 망념(妄念) 그것까지가 없다는 말은 아니다. 생사윤회는 바로 그런 망념 때문에 있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업설과 무아설은 이론적으로 아무런 모순이 되지 않는 것이다.〈대승기신론〉
불교에서는 인간이 인식할 수 있는 세계만을 확실한 것으로 본다는데(十二處說), 이런 입장과 삼세업보설(三世業報說)은 모순되지 않느냐는 견해가 있을 수 있다. 숙세(宿世)나 내세(來世)와 같은 것은 보통 사람이 인식할 수 없는 경계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것도 불교 교의 성격에 대한 올바른 이해라고는 볼 수가 없다. 석가모니께선 각 종교의 진리성 주장에 대해서 권위주의를 배격하고 현실 세계의 관찰로부터 출발할 것을 주장한 것은 앞서 소개한 바 있다. 그러나 이것은 누구나 인정할 수 있는 종교적 진리에 도달하려는 데에 목적이 있었던 것이다. 단순히 현실적인 문제로 시종하려는 의도가 아닌 것이다.
불교의 三世業報說은 권위주의적 입장에서 베풀어진 것이 아니라, 현실 세계의 인과(因果선악의 업에 따라 받는 과보)를 관찰하면 누구나 그 필연성을 추단(推斷. 사물을 추측하여 판단) 할 수 있는 내용의 것이다. 뿐만 아니라 불교의 업설은 단순히 인간의 합리적 사유의 소산으로 그친 것이 아니라, 석가모니처럼 깨달음을 이루면 “삼세업보의 실상(實相)이 직접 인식되는 숙명통(宿命通 전생을 아는 신통력)이나 천안통(天眼通 세간의 모든 것을 꿰뚫어 보는 신통력)과 같은 지혜도 발생한다”고 한다.
따라서 불교의 삼세업보설에 대해 부정적 태도로 임해서는 안 된다고 본다. 불교에 입문한 사람이면 누구나 그것부터 실천해야 할 가장 기본적인 수행법이라고 하겠다. 불교의 계율은 업설에 입각한 것이며, 과거칠불(過去七佛) 또한 모두 다음과 같은 게송(偈頌. 七佛通戒偈 부처의 공덕과 가르침을 찬탄하는 노래)을 읊고 계신다. “모든 악은 짓 지 말고 모든 善은 힘써하며 그 의지를 스스로 깨끗하게 하라. 이것이 모든 부처님의 가르침이다(諸惡莫作제악막작 衆善奉行중선봉행 自淨其意자정기의 是諸佛敎시제불교).”〈법구경 183 諸佛通偈제불통게〉
석가모니께선 당시 인도 사회의 사성제도(四姓制度. 신분제)를 비판하고 배격하신 것도 업설의 정신에 의했던 것이다. 사성은 모두 선·악업에 의해 상벌(賞罰)이 결정되는 것이니, 귀천은 업에 의한 것이지 종성(種姓)에 의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잡아함 권 20>
바라문교의 공희(供犧. 邪盛大會 산 제물을 바치는 의식)에 대해서도 수백 마리의 소와 양 등을 살상하는 것은 반대하셨으니, 이것 역시 업설의 불살생(不殺生)에 의한 것이다.<잡아함 권 4>
불교 업설의 사회 윤리적 성격은 오늘의 민주사회에 있어서도 깊은 관심을 받을 만하다. 자유와 책임, 권리와 의무 등이 민주시민의 기본정신이 되어야 하는데, 업설(業說)에서의 업(業)은 인간의 자유의지에 입각한 능동적 행위이며, 보(報)는 그에 대한 철저한 책임을 행위자에게 지우고 있다. 또 현대사회가 바라는 인간관은 현실 극복의 강인한 의지를 가진 창의적 인간이라고 보겠는데, 업설의 정신은 바로 그런 입장을 잘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이민행 대표기자(浮雲 松巖 hpcj3355.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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